전편에서 말했듯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1천 페이지의 글도 부족하고 그렇게 쓴다고 해도 만인이 동의하는 올바른 엔딩이 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나는 결론을 내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다는 것 정도를 제대로 말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나는 선택 문제를 확정시켜 버리는 철학자가 싫다. 예를 들면 칸토 말이다. 예를 들면 헤겔 말이다. 예를 들면 악셀호넷 말이다. 또 과학적인 이유만으로 인간을 확증, 해석하는 과학자들의 그 이유도 싫어한다. 시작하겠다. 당연하다는 듯이 술을 마시고 사용한다. (삼일전에 일하다가 말벌과 교통사고가 났다.) 주행 중인 나와 비행 중인 말벌과의 고의성 등 전혀 없는 교통사고였는데 말벌이 내 헬멧과 눈 옆에 끼어버렸다. 사고 당시 그놈의 모양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떤 좀 큰 벌레가 들어왔다는 것 정도밖에 몰랐어. 하지만 놀란 놈이 내 관자놀이에 침을 ‘딱’ 놓았을 때 나는 절로 ‘첫차!’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시골에 살 때 꿀벌에게 많이 쏘여봤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말벌이나 다른 큰 말벌의 종류는 아니었다. 말벌이 그랬다면 나는 지금쯤 병원에 입원했을 것이다. 호박벌도 아니고 민둥벌이었나? 어쨌든 그런 비슷한 이름의 왜소한 말벌류였을 것이다. 지벌이 아닌 충격량이 지벌의 질량이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이틀 동안 자율금주를 하고 상황을 지켜봤지만 3일이 지나도록 부기만 퍼질 뿐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오늘 낮에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그런 상태에서 술을 마시고 쓴다. 나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시작은 이랬다. 유물변증법적으로 선택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물론 나는 답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걸 글로 푸는 게 힘들어. ‘주체의 사적 진입’에 대한 부분도 이해시키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보다 상위 단계의 개념을 풀어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확실한 것은, 나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 같은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 푸코의 저서처럼 한 개인의 의식행위란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주변 배후 합의의 총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싶지도 않다. 물론 푸코는 결론을 내리지도 않는 자이며 푸코의 텍스트보다 푸코가 왜 그런 텍스트를 냈는지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나는 에리히 프롬처럼 균형감을 잃고 인간성을 너무 강조해 모든 사건을 그에게 복무시키는 결론을 내리고 싶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처럼 인간 자체를 우주적 관점으로만 해석해 인간 행위를 속으로 조롱하는 그 태도를 본받을 생각도 없다.나는 구축과 탈구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또한 나는 변혁운동을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니체처럼 적당히 페스티벌을 하고는 있지만 니체처럼 주체를 강조하려다 현상을 의도적으로 줄일 생각도 없다.물론 그들은 모두 내 안에 있었고, 내 사유에는 그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러나 내 사유의 시작은 불가적이고 광대했던 동양철학이었다. 철학서로 간주되는 첫 번째 책은 아버지를 통해 훈육된 동몽선습과 천자문이었고, 이후 논어였다. 초등학생 때는 역사와 지리 모험 추리 전기 백과사전 소설 각종 식물 동물 곤충도감과 과학서적 반공서적을 주로 읽었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도덕경 채근담 멜로소설 야설 각종 예술서 니체 에리히 프롬 키에르케고르 선종의 불경 구약성경 게임서적 등을 보았고 고등학생 때부터는 무협지와 판타지소설 현대문학 근현대정치사 패션잡지 만화를 보았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부터는 슬슬 책을 내려놓고 사유의 영역에 들어가 있었다. 독서보다는 음악과 미술에 들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지하게 출가를 고민했다. 그때 나는 주변 학생들과 내가 다르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확정하게 된 것이다. 나는 내 법이 맞는지 틀린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성철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에 대한 괴롭힘을 대충 캐보니 한국 불교계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도 나는 고립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교단 혹은 종교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도 나 같은 종은 머리 덩어리일 뿐이다. 설사 나를 받아들인다 해도 석가를 브라흐마의 화신 중 하나로 정하는 카레국의 결론이 내려질 뿐이었다. 칸트처럼, 헤겔처럼.그렇다고 철학과에 갈 수도 없었다. 적어도 조상 3대의 은덕이 있어야 먹고 사니즘 걱정이 없는 철학과에 가는 것이다.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다 나는 적당히 타협하고 성대천콘으로 가서 철학 동아리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 집이 좀 살았으면 그리고 내가 신분 상승 욕구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1년 재수해서 서울대 갔을 것이다. 원래 고등학생 때는 서울대에 가야 하는 성적이었으니까. 고등학생 때 입학 성적은 전교 4등이었다. 비평준화 고교였던 우리 학교는 한 해 서울대를 1020명 사이로 보낸다. 입학 성적으로만 본다면 서울대에 가야 하는 게 맞다, 문리과 분리된 고2 기말 때 내 성적은 이과에서만 220등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6개월 만에 과학 18위까지 만들었다. 혼자 공부해. 이런 수직상승곡선을 그리는 놈도 없잖아. 그 사이에 뭐 했냐고? 말했잖아.그림 그리고, 글 쓰고, 음악 감상하고, 게임했대. 공부를 뒤로 미룬 것이 아니라 키워드만 남기고 거기에 천착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해. 청소년기에는 예술이어야 한다.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내가 성대에 가려고 한 이유는(그래서 그렇게 치고 놀더라도 고3 때 공부를 한 이유는) 그래도 거기 가면 말이 통하는 놈이 몇 명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서울대에 가는 게 맞지만 나중에 서울대 운동권 아이들과 꽤 사귀어본 결과 역시 내 판단이 맞았다. 그냥 다 거기서 거기로. 서성한도 스카이나도 대화가 가능한 아이들의 비율은 거기다. 철학에 있어서 말이다. 양심에서다 내가 왜 이런말을 하지? 이것도 철학적 주제이기 때문이다. 칸트 헤겔 데카르트 공자 석가모니 예수 마르크스는 모두 자신이 어떻게 그 상태에 도달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쓸 것이다. 내가 계속 미시에 더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가 이 때문이기도 하다.원래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없다. 잘난 척할 수도 있고 자기 변명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맞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잘난 척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지금 오토바이 배달 대행 일을 하는 것에 불만을 느껴야 하는데, 현재까지 내가 해 온 십여 개의 일 중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만족스럽다. 세상 어느 천지에 하루에 10시간 좋아하는 음악만 들으며 일할 수 있고 누군가를 착취하는 것도, 누구의 직접적 착취 대상도 아니고 매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 관찰하고 하루 종일 여행을 하면서 마음껏 사유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건강한 육체노동이 적당히 섞여 있어서 나의 연산능력과 추론능력, 인내심이 곧바로 결론에 반영되는 그런 일자리가 몇 개나 될까. 물론 사탕 같은 것도 많지만 긍정적인 면이 사탕 같은 요소를 상쇄해도 훨씬 많다. 물론 부모도 친척도 출판사도 학교 지인들도 정당에 있는 동지들도 내가 이런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고 걱정한다. 웃기지 마. 나는 내 일에 매우 만족하고, 걸핏하면 후배들에게 이 일에 들어가라고 권유하고 있어. 물론 위험한 일이다. 세상의 눈도 곱지 않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전생물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나라면 나는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배달 일을 시작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유적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내 경험을, 내가 과거를 돌아보며 왜 그 판단을 했는지 수없이 생각했다. 고민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민보다는 객관적 분석이 주를 이뤘다. 왜 적성검사에서는 나를 저런 직업이 적성에 맞다고 하고, 현재의 나는 왜 그때의 연속선상에서 나는 결국 이런 직업을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할까.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관찰자였다. 그렇다면 나는 처음부터 관찰자였을까?전혀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나는 그저 궁금할 뿐이었어. 나를 관찰자로 만든 것은 외부였다. 나라는 주체는 관찰자가 꿈이 아니었다. 나는 영원성을 기반으로 한 2인자, 3인자가 되고 싶었어. 영화 하이랜더의 그 하이랜더나 톰 크루즈 주연의 그 뱀파이어 같은 존재 말이다.주목받지 않고 똑똑한 자. 그래서 닥터 파우스트 말이다. 그래서 내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우습게 보는 거야. 내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테라는 존재가 이상했다.그렇다고 아는 것에 대한 의지, 그것만을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어딘가에서 지금보다 세간의 평판이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알 의지가 있었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것을 우려했다. 이게 문제였다. 그걸 너무 어릴 때 알아버린 게 문제였어. 그리고 그 문제는 영원성 추구에 따른 것이었다. 바로 본질에 대한 추구. 바로 철학을 추구한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세상의 일인자가 되기 어렵고, 일인자가 되기 위한 결심도 어렵다. 마찬가지로 2인자가 되기도 어렵고 2인자가 되기 위한 마음도 어렵다. 부단한 심신수련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1인자가 되려면 나의 많은 부분을 버려야 한다.(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1인자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1인자는 히틀러가 될 수도 있고 7기병대가 될 수도 있다. 세상은 1등만 기억하고 있어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물론 필요하다면 이순신이 되고 제갈량이 되고 싶었지만 20세기에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박정희가 되고 이승만이 될 뿐이다. 초등학생 때 나는 대략 4만 권이나 6만 권의 책을 읽었다. 원본도 있지만 상당 부분 아동 요약본이다. 그러니까 까치문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거야. 하루에 12시간 이상 책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책이… 거기서부터 거기다. 정독 위주로 읽지만 간독이 점점 많아진다. 그러니까 저 숫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