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
다른 표기언어 French literature
요약 프랑스와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프랑스어로 쓰인 문학작품의 총체.목차 전개하는 중세 프랑스 문학 ┗ 프랑스어의 기원 ┗ 무훈시(무훈 시)┗ 브르타뉴 설화 ┗ 〈 여우 이야기 〉…리오·루이토우브에프 ┗ 〈 장미 이야기 〉 ┗ 14.15세기 서정 시인 ┗ 산문 문학 ┗ 연극 16세기 프랑스 문학 ┗ 개요 ┗시 ┗ 산문 17세기 프랑스 문학 ┗ 고전 주의의 준비 ┗의 전반기의 희곡 ┗ 고전 주의 문학의 개화 ┗ 왕조 옛 섞어 살상공 잡거 논쟁 18세기 프랑스 문학 ┗ 계몽 사상 ┗ 연극 ┗ 시, 소설, 기타 19세기 대혁명으로 1850년까지 프랑스 문학 ┗대 혁명과 낭만 주의의 준비 ┗ 낭만 주의 ┗ 낭만파의 시 ┗ 낭만파 연극 ┗ 낭만파와 발자크의 소설 ┗의 낭만 주의 시대의 역사와 비평 185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프랑스 문학 ┗ 개요 ┗시에서의 새로운 방향 ┗ 사실주의 소설 ┗ 사실주의 연극 ┗ 자연 주의 ┗ 상징 주의의 상징 주의 시대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프랑스 문학 ┗소설 市 시 演劇 연극 文芸 문예 비평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 문학 概要 개요 市 시┗ 소설 演劇 연극 哲学 철학 批評 문예 비평 중세 이래 프랑스는 유럽의 지적 생활에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어느 시대나 프랑스 문학작품과 프랑스어는 국경 멀리 저쪽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고대 그리스·라틴 문학의 모방을 바탕으로 한 문화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프랑스의 이 고전주의 전통은 이성, 형식의 완전성, 언어의 순수성을 존중했다.1820년대부터 고전주의적 이상은 낭만주의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낭만주의는 이성에 대해 상상력의 주장을, 사회적 규범에 대해 개인을 옹호했다. 시의 영역이 빅토르 위고, 샤를 보들레르, 아르투일 람보에 의해 넓어졌고, 20세기 모더니즘 혁명의 결과로 모든 시의 형식이 다시 정의됐다. 소설 부분에서는 오노레 바르작의 〈인간희극 comédie Humaine〉부터 에밀 졸라의 사회적 리얼리즘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의 가능성 탐구와 개척이 이루어졌다.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지적·예술적 삶의 중심이었던 파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위상이 쇠퇴하면서 프랑스어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약화됐다. 그러던 중 ‘누보 로망’의 제창자들은 이 장르의 관례에 철저한 공격을 가했고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작가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합리적인 탐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중세 프랑스 문학, 프랑스어의 기원, 프랑스의 옛 영토인 갈리아가 BC51년 로마 제국에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 갈리아족은 갈리아어를 사용했다.그 후 갈리아어는 통속 라틴어로 바뀌고 그것이 전와하여 갈로에 망어(galloroman)가 되었다. 이 언어는 대략 9세기까지 두 그룹의 언어, 즉 루아르강 북부의 랭도일과 남부의 랭도크로 나뉘었다. 랑구도일 지역에는 여러 방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파리 지역인 인도프랑스 지방에서 쓰이던 프랑시안어가 다른 방언보다 더 발달하여 오늘날의 프랑스어가 되었다.갈로망어로 쓰인 첫 번째 문헌은 <스트라스부르 서약 Serments de Stras bourg>(842)인데, 이는 샤를마뉴 대제가 제국을 분할할 때 그의 손자인 루이(루트비히)와 샤를(칼) 형제가 큰형 로테르에 맞서 맺은 서약이다(루트비히 2세, 카를 2세). 이 서약에서 시작하여 13세기까지의 프랑스어를 고대 프랑스어 시대라고 하며, 14~16세기를 중기 프랑스어 시대라고 하며,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를 현대 프랑스어 시대라고 한다.무훈시 1200년까지 거의 모든 프랑스 문학은 운문이었으며 구두로 청중에게 전해졌다.’정글루’로 불리는 유랑 가수들이 톨베르로 불리는 북프랑스 시인들에게서 작품을 사서 악기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방방곡곡을 다닌 것이다. 중세 봉건사회가 특히 좋아했던 작품은 무훈시라는 서사시로 80여 편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것은 <로랑의 노래 Chansonde Roland>(1100경)이다. 작가 미상의 <로랑의 노래>는 샤를마뉴가 스페인 이교도들과 싸워 이기고 돌아올 때 후위군 지휘관이었던 로랑 피레네의 협곡 롱스보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았지만 뿔피리를 불어 구원군을 요청하는 것을 거절하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다는 이야기다.봉건사회의 양대 원리, 즉 명예(군주에 대한 충성)와 신앙(기독교)이 잘 어우러져 있다.브르타뉴 설화 중세의 설화문학은 12세기 중반 절정에 달했다.그 기원은 십자군 원정에서 비롯되었고 고대 문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상력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켈트족 전설의 브르타뉴 설화였다.중세에 널리 인기를 끌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숙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토마(12세기) 프랑스어 헌책을 통해 전해진다. 원탁 기사들의 모험담은 아서(아르튀르) 왕 전설을 줄거리로 한다.이 장르의 대작가는 크레티안 드 트로바이며 그는 1165~82년 이 글을 썼다. 그는 켈트족의 전설을 주제로 ‘궁정 연애’, 즉 신비롭고 기사다운 연애, 귀부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헌신적인 연애를 그렸는데, 이 연애관은 남프랑스 시인들, 즉 톨바도르로부터 직접 빌려온 것이다. 그의 작품 <랑슬로: 차에 탄 기사 Lancelot, lechevalierà lacharrette>(1172경)은 아서 왕비 귀네비아에게 반한 주인공이 납치된 왕비를 구출하는 이야기이고, <이반: 사자를 이끄는 기사 Yvain, lechevalieraulion>(1173)은 성주의 과부에게 반한 주인공이 온갖 모험을 겪은 후 마침내 사랑받는다는 이야기다.또한 그의 <페르스발 퍼시벌>은 ‘성배 탐색’ 설화의 길을 열었다. 브르타뉴 설화는 프랑스 문학 속에 연애의 지상권과 여성의 상석권이라는 관념을 끌어들였다.<여우 이야기>·파브리오 류토보프 위에서 본 장르가 봉건 귀족의 감정과 동경에 부합한 기사도 문학이라면 도시의 발달과 함께 부르주아가 사회적 중요성을 획득함으로써 13세기에는 풍자와 익살이 넘치는 부르주아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운문설화체인 <여우이야기 Romande Renart>와 파브리오, 서정시인 류트보프다. 라이언 노블 왕이 군림하는 동물왕국에서 여우 루나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봉건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파브리오는 친근한 일상생활에서 이끌어낸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지만 부도덕과 천박함이 특징이다. 프랑스 최초의 위대한 서정시인 뤼트보프(13세기)는 격분한 어조로 부르주바 귀족 성직자의 부패를 고발했다.<장미 이야기> 프랑스 알레고리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품은 <장미 이야기 Romandela Rose>였다.전편(1230?)은 기욤 드 롤리스, 후편(1277경)은 장 드 멘에 의해 각각 쓰여졌다. 기욤 드로레스는 우의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명예에 대한 심리를 분석했다. 장두맹은 그의 미완성 작품을 완성하고자 우주·인생·종교·도덕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지만, 이 두 작가의 정신은 전혀 달랐다.1415세기 서정시인의 음악가이자 시인 기욤 드 마쇼(130077)는 발라드 론도 빌레 등 새로운 시형의 보급 발전에 기여했다.웨스타슈 데샹(1346경-1406경)은 그의 제자로 다작 시인이었다. 25세에 과부가 된 크리스틴 드 피잔(1363경~1430경)의 시에는 애수가 있고, 알란 샤르티에(1385경~1433경)는 <차가운 미희 LaBelle Desansmerci>로 유명한 궁정 시인이다. 샤를 도를레앙(1391~1465)은 백년 전쟁의 희생자로 25년간이나 영국의 포로가 된 적이 있으며 우아한 시를 쓴 최상의 작가다(올레앙). 그러나 중세 최대의 서정 시인은 프랑수아 비용(1431~63?)이다.그는 사기꾼이자 방탕아이자 살인자였지만 감정의 성실함이 가득한 <소유언집 Petit Testament>(1456)와 <대유언집 Grand Testament>(1461)를 남겼다.산문문학 1200년 이래 산문이 문학매체로 번성했다.성배 탐색, 아더 왕, 트리스탄 등의 전설이 산문으로 고쳐졌다. 이외에도 새롭게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산문으로 등장했다. 15세기 초 <결혼의 15가지 즐거움 Quinzejoies demariage>, 앙투안 드 라살의 <소년 장 드 생트레 Petit Jehande Saintré>(1456), <신 100편 Centnouveles nouveles>(1465경) 하지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연대기다. 조플루아 드 빌라르두앵(1150경~1212경)이 쓴 ‘콘스탄티노플 정복 Constantinople’은 4차 십자군 원정(1199~1204) 이야기이며 장 드 주앙빌(1224~1319)의 ‘루이 성왕전 Histoire de Saint Louis’는 그가 84세에 완결된 루이 9세의 전기다.장 플루아사르(1337~1410)의 <연대기 Chroniques>는 그 시대의 기사 도적 광기로 가득 차 있고 필립 드 코민(1447~1511)의 <회고록 Mémoires>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Il Principe>에 필적하는 ‘제왕의 애독서’다.연극 연극의 기원은 종교극과 속극 두 가지가 있다.종교극은 처음에는 종교의식, 즉 전례극으로 교회에서 연출됐다. 이후 무대가 교회 밖으로 나오고 주제도 점차 세속화되고 다양해지면서 폭도 더 넓어졌다. 주제가 세속화된 예로는 장 보델(12세기)의 <성 니콜라극 Jeude Saint Nicolas>가 있으며 주제가 더욱 다양해진 예로는 14세기에 활발해진 성모 기적극(Miracles de Notre-Dame)이 있는데, 이 극에서는 대단원에 보통 성모가 출현한다(기적극). 규모가 더 커진 예로는 <성사극 My stres>가 있는데, 이 극의 상연은 흔히 며칠 또는 몇 주씩 이어지며 등장인물이 수백 명에 이를 때도 있어 동시적 장치를 사용해 전 종교사를 펼쳤다.<별사극> 작가로는 외스타슈 마르카데와 아르눌 그레뱅(1420경~71경)이 알려져 있다.속극으로는 아단 드라 알의 녹음극 LeJeudelafeuillée(1275 이후)와 로반 마
프랑스 문학
다른 표기언어 French literature
요약 프랑스와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프랑스어로 쓰인 문학작품의 총체.목차 전개하는 중세 프랑스 문학 ┗ 프랑스어의 기원 ┗ 무훈시(무훈 시)┗ 브르타뉴 설화 ┗ 〈 여우 이야기 〉…리오·루이토우브에프 ┗ 〈 장미 이야기 〉 ┗ 14.15세기 서정 시인 ┗ 산문 문학 ┗ 연극 16세기 프랑스 문학 ┗ 개요 ┗시 ┗ 산문 17세기 프랑스 문학 ┗ 고전 주의의 준비 ┗의 전반기의 희곡 ┗ 고전 주의 문학의 개화 ┗ 왕조 옛 섞어 살상공 잡거 논쟁 18세기 프랑스 문학 ┗ 계몽 사상 ┗ 연극 ┗ 시, 소설, 기타 19세기 대혁명으로 1850년까지 프랑스 문학 ┗대 혁명과 낭만 주의의 준비 ┗ 낭만 주의 ┗ 낭만파의 시 ┗ 낭만파 연극 ┗ 낭만파와 발자크의 소설 ┗의 낭만 주의 시대의 역사와 비평 185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프랑스 문학 ┗ 개요 ┗시에서의 새로운 방향 ┗ 사실주의 소설 ┗ 사실주의 연극 ┗ 자연 주의 ┗ 상징 주의의 상징 주의 시대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프랑스 문학 ┗소설 市 시 演劇 연극 文芸 문예 비평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 문학 概要 개요 市 시┗ 소설 演劇 연극 哲学 철학 批評 문예 비평 중세 이래 프랑스는 유럽의 지적 생활에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어느 시대나 프랑스 문학작품과 프랑스어는 국경 멀리 저쪽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고대 그리스·라틴 문학의 모방을 바탕으로 한 문화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프랑스의 이 고전주의 전통은 이성, 형식의 완전성, 언어의 순수성을 존중했다.1820년대부터 고전주의적 이상은 낭만주의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낭만주의는 이성에 대해 상상력의 주장을, 사회적 규범에 대해 개인을 옹호했다. 시의 영역이 빅토르 위고, 샤를 보들레르, 아르투일 람보에 의해 넓어졌고, 20세기 모더니즘 혁명의 결과로 모든 시의 형식이 다시 정의됐다. 소설 부분에서는 오노레 바르작의 〈인간희극 comédie Humaine〉부터 에밀 졸라의 사회적 리얼리즘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의 가능성 탐구와 개척이 이루어졌다.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지적·예술적 삶의 중심이었던 파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위상이 쇠퇴하면서 프랑스어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약화됐다. 그러던 중 ‘누보 로망’의 제창자들은 이 장르의 관례에 철저한 공격을 가했고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작가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합리적인 탐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중세 프랑스 문학, 프랑스어의 기원, 프랑스의 옛 영토인 갈리아가 BC51년 로마 제국에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 갈리아족은 갈리아어를 사용했다.그 후 갈리아어는 통속 라틴어로 바뀌고 그것이 전와하여 갈로에 망어(galloroman)가 되었다. 이 언어는 대략 9세기까지 두 그룹의 언어, 즉 루아르강 북부의 랭도일과 남부의 랭도크로 나뉘었다. 랑구도일 지역에는 여러 방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파리 지역인 인도프랑스 지방에서 쓰이던 프랑시안어가 다른 방언보다 더 발달하여 오늘날의 프랑스어가 되었다.갈로망어로 쓰인 첫 번째 문헌은 <스트라스부르 서약 Serments de Stras bourg>(842)인데, 이는 샤를마뉴 대제가 제국을 분할할 때 그의 손자인 루이(루트비히)와 샤를(칼) 형제가 큰형 로테르에 맞서 맺은 서약이다(루트비히 2세, 카를 2세). 이 서약에서 시작하여 13세기까지의 프랑스어를 고대 프랑스어 시대라고 하며, 14~16세기를 중기 프랑스어 시대라고 하며,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를 현대 프랑스어 시대라고 한다.무훈시 1200년까지 거의 모든 프랑스 문학은 운문이었으며 구두로 청중에게 전해졌다.’정글루’로 불리는 유랑 가수들이 톨베르로 불리는 북프랑스 시인들에게서 작품을 사서 악기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방방곡곡을 다닌 것이다. 중세 봉건사회가 특히 좋아했던 작품은 무훈시라는 서사시로 80여 편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것은 <로랑의 노래 Chansonde Roland>(1100경)이다. 작가 미상의 <로랑의 노래>는 샤를마뉴가 스페인 이교도들과 싸워 이기고 돌아올 때 후위군 지휘관이었던 로랑 피레네의 협곡 롱스보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았지만 뿔피리를 불어 구원군을 요청하는 것을 거절하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다는 이야기다.봉건사회의 양대 원리, 즉 명예(군주에 대한 충성)와 신앙(기독교)이 잘 어우러져 있다.브르타뉴 설화 중세의 설화문학은 12세기 중반 절정에 달했다.그 기원은 십자군 원정에서 비롯되었고 고대 문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상력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켈트족 전설의 브르타뉴 설화였다.중세에 널리 인기를 끌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숙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토마(12세기) 프랑스어 헌책을 통해 전해진다. 원탁 기사들의 모험담은 아서(아르튀르) 왕 전설을 줄거리로 한다.이 장르의 대작가는 크레티안 드 트로바이며 그는 1165~82년 이 글을 썼다. 그는 켈트족의 전설을 주제로 ‘궁정 연애’, 즉 신비롭고 기사다운 연애, 귀부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헌신적인 연애를 그렸는데, 이 연애관은 남프랑스 시인들, 즉 톨바도르로부터 직접 빌려온 것이다. 그의 작품 <랑슬로: 차에 탄 기사 Lancelot, lechevalierà lacharrette>(1172경)은 아서 왕비 귀네비아에게 반한 주인공이 납치된 왕비를 구출하는 이야기이고, <이반: 사자를 이끄는 기사 Yvain, lechevalieraulion>(1173)은 성주의 과부에게 반한 주인공이 온갖 모험을 겪은 후 마침내 사랑받는다는 이야기다.또한 그의 <페르스발 퍼시벌>은 ‘성배 탐색’ 설화의 길을 열었다. 브르타뉴 설화는 프랑스 문학 속에 연애의 지상권과 여성의 상석권이라는 관념을 끌어들였다.<여우 이야기>·파브리오 류토보프 위에서 본 장르가 봉건 귀족의 감정과 동경에 부합한 기사도 문학이라면 도시의 발달과 함께 부르주아가 사회적 중요성을 획득함으로써 13세기에는 풍자와 익살이 넘치는 부르주아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운문설화체인 <여우이야기 Romande Renart>와 파브리오, 서정시인 류트보프다. 라이언 노블 왕이 군림하는 동물왕국에서 여우 루나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봉건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파브리오는 친근한 일상생활에서 이끌어낸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지만 부도덕과 천박함이 특징이다. 프랑스 최초의 위대한 서정시인 뤼트보프(13세기)는 격분한 어조로 부르주바 귀족 성직자의 부패를 고발했다.<장미 이야기> 프랑스 알레고리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품은 <장미 이야기 Romandela Rose>였다.전편(1230?)은 기욤 드 롤리스, 후편(1277경)은 장 드 멘에 의해 각각 쓰여졌다. 기욤 드로레스는 우의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명예에 대한 심리를 분석했다. 장두맹은 그의 미완성 작품을 완성하고자 우주·인생·종교·도덕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지만, 이 두 작가의 정신은 전혀 달랐다.1415세기 서정시인의 음악가이자 시인 기욤 드 마쇼(130077)는 발라드 론도 빌레 등 새로운 시형의 보급 발전에 기여했다.웨스타슈 데샹(1346경-1406경)은 그의 제자로 다작 시인이었다. 25세에 과부가 된 크리스틴 드 피잔(1363경~1430경)의 시에는 애수가 있고, 알란 샤르티에(1385경~1433경)는 <차가운 미희 LaBelle Desansmerci>로 유명한 궁정 시인이다. 샤를 도를레앙(1391~1465)은 백년 전쟁의 희생자로 25년간이나 영국의 포로가 된 적이 있으며 우아한 시를 쓴 최상의 작가다(올레앙). 그러나 중세 최대의 서정 시인은 프랑수아 비용(1431~63?)이다.그는 사기꾼이자 방탕아이자 살인자였지만 감정의 성실함이 가득한 <소유언집 Petit Testament>(1456)와 <대유언집 Grand Testament>(1461)를 남겼다.산문문학 1200년 이래 산문이 문학매체로 번성했다.성배 탐색, 아더 왕, 트리스탄 등의 전설이 산문으로 고쳐졌다. 이외에도 새롭게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산문으로 등장했다. 15세기 초 <결혼의 15가지 즐거움 Quinzejoies demariage>, 앙투안 드 라살의 <소년 장 드 생트레 Petit Jehande Saintré>(1456), <신 100편 Centnouveles nouveles>(1465경) 하지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연대기다. 조플루아 드 빌라르두앵(1150경~1212경)이 쓴 ‘콘스탄티노플 정복 Constantinople’은 4차 십자군 원정(1199~1204) 이야기이며 장 드 주앙빌(1224~1319)의 ‘루이 성왕전 Histoire de Saint Louis’는 그가 84세에 완결된 루이 9세의 전기다.장 플루아사르(1337~1410)의 <연대기 Chroniques>는 그 시대의 기사 도적 광기로 가득 차 있고 필립 드 코민(1447~1511)의 <회고록 Mémoires>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Il Principe>에 필적하는 ‘제왕의 애독서’다.연극 연극의 기원은 종교극과 속극 두 가지가 있다.종교극은 처음에는 종교의식, 즉 전례극으로 교회에서 연출됐다. 이후 무대가 교회 밖으로 나오고 주제도 점차 세속화되고 다양해지면서 폭도 더 넓어졌다. 주제가 세속화된 예로는 장 보델(12세기)의 <성 니콜라극 Jeude Saint Nicolas>가 있으며 주제가 더욱 다양해진 예로는 14세기에 활발해진 성모 기적극(Miracles de Notre-Dame)이 있는데, 이 극에서는 대단원에 보통 성모가 출현한다(기적극). 규모가 더 커진 예로는 <성사극 My stres>가 있는데, 이 극의 상연은 흔히 며칠 또는 몇 주씩 이어지며 등장인물이 수백 명에 이를 때도 있어 동시적 장치를 사용해 전 종교사를 펼쳤다.<별사극> 작가로는 외스타슈 마르카데와 아르눌 그레뱅(1420경~71경)이 알려져 있다.속극으로는 아단 드라 알의 녹음극 LeJeudelafeuillée(1275 이후)와 로반 마
시의 시대에는 시가 찬란하게 꽃피었다. 압운파 시인 장 마로의 아들이자 제자인 클레망 말로(1496~1544)는 ‘멋진 표주박’에 능한 세련된 궁중 시인으로서 특히 론도 발라드·경구·서한시가 뛰어났다. 신교도로 박해를 받은 그는 이단자로 감옥살이를 한 뒤 시집 『지옥 L’Enfer』(1526)에서 신랄한 어조로 재판을 풍자했다. 리옹에서는 모리스 세브(1501경~60경)를 비롯해 <시집 Rymes>(1545)에서 페르네트 뒤 기예가, <작품집 Oeuvres>(1555)에서 루이스 라베가 화려하게 등장했다.세부는 특히 그의 오랜 연애시 <델리 Délie>(1544)로 이름을 날렸다.이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은 물론 피에르 드 론사르(152485)였다. 그는 관능적이고 애수에 젖어 있었으며 아름다움과 자연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는 오드와 소네트 안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자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오드리는 5권의 송가집 Odes(155053) 안에 들어 있으며 소넷은 3권의 연애시집 Amours(1552, 1555, 1574) 안에 들어 있다. 프레야드파 가운데 론사르 다음으로 뛰어난 시인은 조아산 뒤 벨레(152560)다. 그는 이탈리아 소네트를 프랑스에 도입했지만 그의 올리브 L Olive(1549)는 페트라르카풍의 소네트 시집이다. 그의 걸작 <망향 Regrets>(1558)는 그가 로마에 장기간 머무는 동안 고향인 안주에 대한 향수를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외에도 플레어드 시인들은 많은 시집을 냈는데 앙투안 드 바이프의 『멜린의 사랑 Les Amours de Méline』(1552)·『프랑신의 사랑 Les Amours de France』(1555), 레미 벨로의 『연애와 보석의 새로운 교환 Amourset nouveauxéchanges de pierresprécieus』(1576) 등이 있다.같은 시파 에티엔 조델은 최초의 근대적 비극 <잡힌 클레오파트라 Céop ttrecaptive>(1553)로 알려져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 비극작가는 로베르 가르니에(1544~90)로, 그의 대표작으로는 ‘유대인들 Sédécieules Juives'(1583), ‘안티곤 Antigone'(1580) 등이 있다.16세기 후반은 극심한 내란기였지만 신교도 아그리파 오비녜(1550~1630)가 쓴 『단장의 노래 Les Tragiques』(1616)는 그런 종교전쟁의 전화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이는 개신교의 적에 대한 끊임없는 저주로 가득 찬 서정시이자 서사시다. 이 시대의 마지막 대시인은 마튀란 레니에(1573~1613)이며 우스꽝스러운 일을 정확히 재현하고 있는 그의 <풍자시 Satires>(1608~13)는 17세기 고전주의의 비개성적 문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산문 프랑수아 라브레(1494경~1553)의 5부작 『판타그뤼엘 판타그뤼엘』과 『가르간튀아 Gargantua』는 1532~64년에 걸쳐 간행되었다(가르간튀아와 판타그뤼엘). 러블레는 너무나 황당하고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를 통해 그 시절에는 말하는 것이 분명 위험했을 사상을 표현했다.가르간튀아와 판타그뤼엘, 파뉴르즈 등과 같은 그의 주인공들, 그리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단 하나의 규칙 아래 평등하고 자유로운 젊은 남녀들이 오로지 마음과 정신의 즐거움만을 따라 생활하는 테렘의 수도원은 너무나 유명하다. 프랑수아 1세의 누나 마르그리트 당그렘(1492~1549)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본뜬 ‘칠일 이야기 Heptaméron'(1558)을 남겼다.미셸 드 몽테뉴(1533-93)의 『수상록 Essais』(1580~88)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애독되고 있는 프랑스어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수상록(Essais) Racconish/wikipedia|Public Domain 그는 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몽테뉴는 이 <수상록>에서 “내 자신을 그리려고” 했다. 그것은 지혜를 구하는 인간의 일기이다. 그는 거기에 무뚝뚝한 잡담으로 아무런 계획 없이 완전한 하나의 행복철학을 말했다. 그에 따르면 보편적인 회의주의가 행복하기 위한 제1의 조건이라는 것이다.그는 새로운 교육법을 내놓으면서 교육의 목적은 판단력 양성이라고 했지만 이 방법은 17세기 오넷 옴(honnête homme 교양 있는 신사)을 키우게 됐다. 그는 오넷 옴을 위한 문학, 즉 인간의 정신적 연구를 제재로 하는 문학을 개척했는데, 이 문학이 곧 17세기 고전주의 문학의 선구였다. 몽테뉴에서 볼 수 있는 심리분석과 도덕적 고찰에 대한 기호, 이성에 대한 끊임없는 호소, 고대와의 친교, 보수적 사상은 이미 고전주의 정신의 본질적 특성이 되고 있다.17세기 프랑스 문학 고전주의 준비 17세기 초에 귀족계급이 점차 상류사회로 편성되었는데, 이 변화는 특히 오노레 뒤르페의 전원소설 <아스트레 L’Astrée> 1607~27)과 그 영향으로 랑부에 후작부인이 처음 연 (1608) 살롱에 의해 이루어졌다.문학살롱에서 발달한 프레시오지테는 폐해도 있었지만 프랑스어를 명료하고 우아한 언어로 만드는 데 기여했는데 뱅상 보와튀르(1597~1648)가 그 대표적 시인이며 스퀴델리(1607~1701)는 소설 ‘알타메네스 또는 키루스 대왕 Artamneoulegrand Cyrus'(1649~53)와 ‘클렐리 Célie'(1654~60)로 이 사교계의 풍속을 그렸다. 한편 이 프레시오지테에 대한 반동으로 문숙 작가군이 생겼는데, <희극 이야기 Romancomique>(1651~57)를 쓴 폴 스카론, <부르주아 이야기 Roman bourgeois>(1666)를 쓴 앙투안 플루티에르, 해와 달에 대한 공상적인 여행담을 쓴 실라노 드 베르주락(1619~55) 등이 이에 속한다.
알타메네스 또는 키루스 대왕(Artamneoulegrand Cyrus) MMadeleine de Scudéry / wikipedia | Public Domain 프랑수아 드 말렐브(1555~1628)는 상상력과 개인 감정을 멀리하고 명료함·질서·규칙으로 프랑스어를 정화했다. 그의 업적은 1635년에 창설된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이어졌다. 머렐브는 프랑스어 서정시를 우아하고 세련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영감과 상상력은 결여되어 있었다.그에게는 프랑수아 메나르, 오노라 드라칸 같은 제자도 있었지만 마추란 레니에(1573~1613), 테오필드 비오(1590~1626) 같은 공격자도 있었다. 말레르브가 특히 시를 개혁한 반면 장=루이 게즈 드 바르작(1597~1654)은 산문 정규화에 기여했다.〈방법서설 Discours de laméthode〉(1637)의 저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이성을 진리의 최고 심판자로 간주함으로써 합리주의의 기초를 닦았는데 바로 이 진리의 예찬이 프랑스 고전주의의 근본원리가 되는 것이다.브레즈 파스칼(162362)은 이성에 대한 불신과 강력한 상상력을 옹호함으로써 데카르트와 기타 고전주의 작가와는 구별된다. 그는 얀센주의의 대변인이 되어 <시골 친구에게 쓴 편지 Provinciales>(1656~57)에서 예수회의 안이한 도덕관을 고발하고, 무신론자의 개종(改宗)을 위해 <기독교 변호>를 구상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사후 <명상록 Penées>가 되었는데, 이는 인간 본질과 신앙에 관한 깊은 철학적 고찰로서 사람들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전반기 희곡 1600~30년 가장 인기 있었던 연극 장르는 희비극과 목가극이었다.그러나 1620년대에는 테오필드 비오의 비극 <필라모스와 티스베 Pyrameet Thisbé>(1623)가 큰 성공을 거뒀다. 1630년경에야 정규 비극이 상연되기 시작했는데, 그 작가로는 피에르 코르네유(1606~84), 장 메레(1604~86), 트리스탄 렐미트(1601경~55), 장 드 로틀(1609~50) 등이 있다. 17세기 초 세련된 사교계 인사를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알렉산드르 아르디(15701632)였다.그러자 기존의 중세식 연극을 보다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합리주의적인 사교계의 요구와 작가들의 경향에 부응해 ‘한 곳에서 하루 만에 단 하나의 사건이 완결되도록…’하는 삼일치의 법칙이 확립됐다. 이 법칙이 처음 적용된 것은 메레의 희곡 <실바닐 Silvanire>(1630)이었는데, 그것을 확립하고 실천함으로써 고전주의 비극의 개념을 정착시킨 것은 코르네유의 <루시도 LeCid>(1637)·<호라티우스 Horizon>(1640)·<킨나 Cinna>(1640) 등이었다.〈루 시드〉는 심리적 위기의 연구로서 프랑스 연극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코르네유는 “열정은 이성과 의지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열정론 Trai tédespassions>(1649)를 그의 비극에서 구체화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지적이고 의지적인 프랑스인의 유형을 숭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고 있다.고전주의 문학의 개화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 1660년이 문학사의 구분점이 되면서 고전주의 문학이 꽃피었다.사교인이 가져온 걸작이 있다.라 로슈푸코 공작(1613~80)의 『잠언집 Maximes』(1665)는 염세가의 저작으로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이기주의, 즉 욕심으로 돌리고 있다. 17세기 심리소설 걸작인 라파예트 여사(1634-93)의 ‘클레브 공작부인 La Princessede C vves'(1678)는 마치 코르네유의 비극을 소설화한 듯하다. 딸에게 보낼 편지를 모은 세비녜 여사(1626~96)의 『서한집』(1726)는 지성과 상상력이 가득하다.레스 추기경은 회고록 Mémoires(1717)에서 프론드 난(1648~53)의 경과와 동시대의 인물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니콜라 보와로(1636~1711), 몰리에르(1622~73) 장 라신(1639~99) 라퐁텐(1621~95) 등 4명의 시인은 젊었을 때부터 친분을 쌓았다.평생 독신이면서 문학에 평생을 바친 보와로는 그의 <시학 Artpoétique>(1674)에 의해 고전주의 문학예술 이론가가 되었다. 몰리에르는 극단장이자 배우이자 작가였다. 1659년 <재치를 부리는 여자들 Les Precieus sridicules>가 대성공함으로써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성격 묘사에 역점을 두고 17세기 독특한 인물이면서 영원한 인간형을 그렸다. 그의 주요 작품은 위선자의 전형을 그린 <탈추프 Tartuffe>(1664~66)·<인간혐오자 Le Misanthrope>(1666)·<수잔노 L’ Avare>(1668)·<부르주아 귀족 Bourgeoisgentilhomme>(1670) 등이다.라신(163999)의 안드로마크 안드로이드(1667)는 루시드 못지않은 성공을 거뒀다. 그는 이후 10년간 브리타니키스 Britannicus(1669), 이피제니 Iphigénie(1674), 페들 Phádre(1677) 등 6편의 걸작을 계속 발표했다. <앤드로마크>의 성공은 코르네유 시대와 달리 이제는 전쟁도 프런트난도 겪지 않고 연애만을 생각하는 세대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고전주의 정신은 그 완벽한 표현을 라신우의 비극으로 얻게 된다. 마지막으로 라퐁텐(1621~95)은 〈우화집 Fables〉(1668~94)에서 ‘다양한 100막의 극’을 쓰고자 했는데, 그것은 인간 생활의 완전한 한 폭의 그림이자 동물의 모습 아래 숨겨진 프랑스 사회의 그림이기도 하다.17세기를 논할 때 두 성직자를 떨어뜨릴 수 없다.철저한 가톨릭 옹호자 잭 베니뉴보쉬에게(1627~1704)는 〈의 설교집 Les Sermons〉·〈조사집(조사집) Oraisons funábres〉 외에 〈세계사 서설 Discours surl’histoire universelle〉(1681)에서 논법의 강력함과 웅장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정적주의자(정적주의자)로 보쉬에 온 논쟁 끝에 유죄 선고를 받은 페눌론(1651~1715)은 그의 교육소설 <텔레마크 Les Aventures detélémaque>(1699)에 정치비평을 섞어 넣었다.신구(신구)논쟁 1687~97년에 특히 치열했던 이 논쟁에서 부산 알에 〈 성격론 caractères 〉(1688)의 저자 러브 루이이에루(1645~96)등과 같은 고대 팔다만 고대 문학의 모방만이 우수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 같은데 비해근 대파, 예컨대 〈 동화 Contesdefées 〉의 작가 샤를 페로(1628~1703)은 〈 고대인과 근대인 비교 parallèlesdes anciens et des modernes〉(1688~97)에서 〈 신탁의 역사 Histoires des oracles〉(1687)의 저자 폰 투 네루(1657~1757)은 〈 고대인과 현대인에 대한 여담 Digression sur les anciens et les modernes〉(1688)에서 최선의 현대적 작품은인간정신의 진보에서 당연히 더 우수하다고 주장했다.이 대파가 결국 승리를 거두었고 이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18세기가 싹트고 있었다.18세기 프랑스 문학계몽사상 17세기 말부터 교회 귀족 왕권 등 전통적 권위가 쇠퇴함에 따라 이성의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먼저 이성은 기존 질서의 핵심과 같은 신앙의 원리를 무너뜨린다고 했다.이러한 합리주의적 비판 작업은 두 선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폰투넬은 〈신탁의 역사〉에서 “이성에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고 피에르 벨(1647~1706)은 〈역사와 비평의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1697)로 합리주의를 발전시켰다. 계몽시대 최초의 위대한 철학자 몽테스키(1689~1755)는 〈페르시아인의 편지 Lettres persanes〉(1721)에서 프랑스의 여러 제도와 풍습을 풍자하여 비판했다.그의 <로마인의 위대함과 그 쇠퇴의 원인에 관한 고찰 considération surles causes de lagrandeur des Romainset de lurdécadence>(1734)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역사의 기초를 닦았고,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1748)는 삼권분립이라는 영국의 헌법이론을 소개함으로써 전제정치를 흔들어 놓았다.볼테르(1694~1778)는 시인·극작가·역사가·철학자·소설가로 60년간 프랑스의 지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는 〈철학서한 Lettres philosophiques〉(1734)에서 영국을 정치적·종교적·철학적 자유국가로 소개했는데, 이는 전제주의와 가톨릭주의에 대한 최초의 폭탄과도 같았다.그는 훗날 〈신앙자유론 traitésur latolérance〉(1763)·〈철학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1764)로 직접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공격했다. 또 저딕 Zadig(1747), 칸디드 Candide(1759), 성스러운 남자 Llngénu(1767) 등 철학적 소설에서는 사회 불의, 형이상학적 낙관주의, 정치부패 등을 고발했다.18세기 후반에 철학자들의 그룹이 조직되어 합리적인 철학의 ‘총화’와 같은 <백과전서 Encyclopédie>(1751~72)를 출판함으로써 이성의 승리를 가져왔는데 주요 편집자는 달랑베르(1717~83)와 도니 디드로(1713~84)였다.디드로는 연극 이론가이자 극작가이자 <라모의 조카 Le Neveude Rameau>(1805, 1821, 1891)·<운명론자 자크 Jacquesle fataliste>(1796)를 쓴 당대의 위대한 반소설(anti-roman) 작가이자 프랑스 최초의 미술 비평가(<미술 비평 Salons>, 1759~81)였으나 무신론자로서 기독교 도덕을 공격했다. 진보를 믿었던 18세기 계몽시대의 모든 철학자와 달리 장자 크루소(1712~78)는 진보에 이론을 제기했다.
그와 함께 발레리 라르보와 에드몽 잘루(1878~1949)의 비평 작품에는 유럽 정신이 돋보인다. 안드레 시알레스(1868~1948)와 샤를 뒤 보스(1883~1939)는 비평 속에서 영적인 획득물을 찾았는데, 특히 시알레스는 베르그송적인 방법으로 직관을 통해 작가의 영감과 직접 통하고자 했다.피에르 러셀(18671930)과 줄리안 반다(18671957)의 비평은 이들과 달리 주지주의적이다. 데카르트적 인도주의자 알란(본명은 에밀 샤르티에, 1868~1951)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식과 행동의 비평가였다. R. M. 알베레스, 모리스 나도, 피에르 앙리 시몬, 클로드 에드먼드 마니, 가에탄 피콘 등의 비평은 인간존재가 처한 조건에 대한 추구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비평으로 하나로 묶여 있다. 1960년대 이후 새로운 비평가가 등장했는데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의 창시자인 레비 스트로스, 미셸 푸코(1926~84), 로랑 발트(1915~80) 등이 있다.푸코의 『한 말과 사물Les Motsetleschoses』(1966)는 1940년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L’ rereetlenéant』(1943)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비중을 가졌는데, 그는 이후 『지식의 고고학 L’Archéologied usavoir』(1969)·『성의 역사 Histoiredelas exualité』(3권, 1976~1984)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