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건의 소문은 그 글을 받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53′ 내용을 저승사자는 헤아려 보시오. 무슨 사연인지… (잠시 눈을 조금 떴다 다시 감는다.) 아무튼 앉아라. 54 현장은 그래도 앉을 수 없었다.55″네. 그 내용은 -. “56” 그래서.”57″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저 신라는 나라를 (매년 말을 더듬었다.) -상국에 바치고 -조공을… 성실하게… 그런데 백제-는-.” 58편의 시 “귀국과 백제는” 이래야 하는데 그날은 나오지 않았다.59′ – 조공도 게을리하고 – 다시 귀국과 함께… 신라를… 너무… ’60 문득 이상한 소리가 났다. 눈을 피해 개소문을 보면 깜빡 잠든 듯 약하게 코를 골는 소리가 난다.61 현장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기다렸다.62 많이 기다렸어. 하지만 개소문 코골이는 서서히 본격화된다.63현장은 부러질 정도의 소리로 한 차례 움직였다. 발에서는 쿵 소리도 났다.64개의 소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65″응?응?그래서”66 결국 너무 위압당한 현장은 빨리 회견을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개소문은 듣든 안 듣든 자기 말만 마쳤다.그래서…최대한 사오면 신라에 대한 분노를 푸…사고 정벌을 조금 늦춰 68태종의 분부는 고구려가 신라에 시달리면 진나라가 명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벌할 것이라는 뜻을 고구려에 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현장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69의 말을 들은 개소문은 눈을 뜨고 손뼉을 치며 막하를 불렀다.70 “오늘 아침 남방에서 돌아온 유 장군을 부르시오.” 71막 뒤의 부름으로 유 장군은 달려갔다.72 “유 장군, 오늘 아침 내게 한 보고를 여기 다시 뇌에.” 73 “네. 계림의 양성은 완전히 공략하고 충용군은 기호지세로 남진하고 있습니다.’74’ 수고했다 물러나라. – 사신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지금 계림의 외람된 죄를 벌하고 있다. 그러나 이웃나라 천자의 간청도 있으므로 우리나라 하나님께 묻고 반사하도록 한다. 저승사자도 아시겠지만 중도반사라는 건 패배인가 일반이야. 적병도 이겼다고 할까, 고구려가 당황의 간청으로 반사되었다고나 할까요? 뭐 내 몫으로 하겠다.” 75막 리지의 이 순수한 말에 현장은 조금 용기를 얻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76 막걸리.우리 천자의 호소는 이번이 아니라 장래에도 계림을. 77가지 소문은 그의 큰 머리를 천천히 휘저었다.78 “그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청-계림과 우리와의 오랜 원한이 있으므로, 즉 옛날 수혈 때 북쪽으로 수혈을 잔멸시키기 위해 남쪽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 나적이 남쪽에서 우리 땅 500리를 훔쳤다. 그 행위도 벌하면 우리가 잃은 땅도 되찾아야 하기 때문에 장래까지는 약속할 수 없습니다.79 그건 어차피 지사가 아니니까. 기왕의 말씀을 드리자면 요동의 여러 성들은 모두 구마모토시는 중국의 군현이었던 것이 지금 귀국당이 되었지만 중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80가지 소문은 눈을 한 번 들어 현장을 보자마자 감았다. 아무런 위협미를 띤 눈은 아니었지만 현장은 몸을 떨며 다시 일어섰다.81 “말도 안 되는 소리-요동도 본시는 부여 땅, 한때 중국에 도적당한 것을 되찾은 것이다-.” 82현장은 상당히 망설이다가 그의 마지막 말을 빨리 해버렸다-. 83 “그러면 폐하는 정려의 죽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84″ 그러자 당황도 수양동생처럼 말고기를 자고 정강이마를 타고 분환귀국하게 됩니다.-자, 만리길, 안녕히 계세요.” 85개의 소문은 그의 큰 몸을 일으켜 이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들어가려던 다리를 다시 돌렸다.86 “사신. 그런데 당군이 정도에 오르면 군량은 대략 어떻게 하겠습니까?87’그렇습니다. 각자가 아마 자신의 한 달 식량은 몸에 지니고 오리일 것이다.’88’ 맞아.그럼 안심해라. 우리나라는 작금 흉년이 계속되어 만성이 먹을 것이 걱정인데 – 요행당인이 – 백만으로 해서 – 한 사람 다섯 되씩 가져오려면 – 오백만에 백만 석 – 매명 많이 가져라 – 이 나라는 흉년으로 양곡이 부족하니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해 놓아라.’ 89와는 안으로 들어갔다.90현장은 황급히 귀국했다.91 곧 당 태종에게 복명하였다. 무론복명에는 자신의 비겁하고 교활한 행위를 감추기 위해 더욱 고구려를 과장해 나쁘게 복명했다.92 태종은 개조문에 격분했다.93 물론 개소문이 당나라에 순종하고 공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개소문의 마음을 사려는 의미에서 궁복이나 명마, 금전 등을 여러 차례 개소문에 하사하였으나, 그 매번 개소문은 한 마디 사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천자의 하사품을 초개처럼 여겨 하사품에게 주었으므로 현장의 복명이 기뻐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나, 이번 현장이 천자의 사신으로서 그 푸대접을 받으려고 하자 태종의 앙천을 일일이 조롱하는 태도로 묵살할 수밖에 없었다.94 곧 천하에 조를 내린 95 “고구려의 막안감인 연개소문은 자신의 임금을 섬기고 대신을 없애 백성을 학대하며, 또 지금의 진나라 조나라를 거역하므로 이를 토벌한다.”96 그리고 7월경부터 차근차근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97 그 9월에 연개소문은 태종에게 백금을 약간 보내고 사람 50명을 함께 보내 숙위로 써 달라고 간청하였다.98취업운동 뇌물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단순한 조롱이었다.99 태종은 장안의 부로들을 불렀다.100도 비슷한 말(요동은 본래 중국 땅이었던 점, 고구려의 막안감은 제나라 임금을 비롯한 백성을 괴롭히는 흉적이니 징벌하는 운운)로 부로를 달래고 그 후손을 나라에 바칠 것을 요망하였다.101 이런 때에 있어서는 언제나 같은 일이 반복되지만 부로들은 역시 이 싸움에 반대했다. 일찍이 고구려 정벌군이 참패하지 않은 적이 없고, 그때마다 본시 수백만이라는 큰 무리로 떠나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수천 명뿐이라는 역사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 이 명목 애매한 전쟁에 아이를 내보내기가 싫었다.102 그러나 태종의 결심은 굳어졌다. 그해 동짓달 태종은 낙양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수양제를 따라 고구려 정벌을 간 적이 있는 정모라는 사람을 행재소로 불러 의견을 들어보았다.103 역시 반대였다. 요동은 길이 멀고 곡식 운반도 힘들고 또 동쪽이 잘 지켜 빨리 이기기는 힘듭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104 피크 때와 지금을 비교하는 배가 아니니 나중에 하회를 보라고 단언했다. 각 장군을 명하고 각 도로 나누어 요동에서 모이라고 지시하고 대군을 보냈다.105조를 내렸다. 역시 예전 것과 대동소이한 가운데 예전의 수양제는 백성을 학대하고 고구려왕은 백성을 사랑했으니 사란의 군사로서 안화의 무리를 치려 하면 실패하지 않겠느냐며 이번에는 반드시 이기겠다며 이기는 이유를 5가지 꼽았다.106신라, 백제, 거란 등에도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합세시켰다.107 그 해가 지나 이듬해 4월 태종은 정주에서 다시 천하를 불렀다.108′ 이전 수씨는 4번 동정하여 많은 중국인 자제들을 요동 황야에 잃었다. 짐은 지금 그 자제의 원수를 갚을 겸 고구려왕을 잃은 백성들의 설원도 해주려고 정도에 오르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부로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스스로 융복을 입고 칼을 차고 말을 타고 통수의 길을 떠났다.109 고구려 정벌의 당나라 대군은 수백 리 요동 평원을 사진으로 밤을 흐리며 동쪽으로 이동했다.110 신기한 일이었다. 과거 수나라에서도 쓴 경험을 했지만 당 태종도 적지 않게 쓴 경험을 한 고구려 효용의 군사가 이번에는 왠지 전혀 힘을 잃고 당군에 이르는 곳마다 고구려 성은 함락되고 영토는 유린되는 것이었다.111 야 짐의 위력을 112 태종의 의기는 대단했다.113연전연승, 승승장구했고 당군은 동진했다. 당군이 점령하는 곳마다 땅 이름을 고구려식에서 당식으로 고치고 개모성은 개주, 백암성은 암주 등으로 연이어 나아갔다.114리하여 당군은 안시성에서 40리가 되는 곳에 이르렀다.115 그래서 태종은 수백 기를 데리고 부근 산천의 형세를 관망하고자 조금 높은 언덕에 올라가 보았다.116 즉 전면에 무슨 시커먼 줄이, 그 키가 40리쯤 되는 것이 희미한 것이었다.117 야, 저 세 개의 검은 저것은 뭐야?118’네. 고구려와 마르갈 연합군의 장사진이 온다.’119′ 뭐야!저 사십 리가 넘는 줄이 모두 군사인가?’120′ 네.121 태종은 망연히 바라보았다. 얼굴 근육이 저절로 굳어졌다.122 “내 오산이었나? 고구려가 너무 만만해져서 그것은 옛날까지 나를 유인하려는 술책이 아니었을까.123막리지연개소문 124당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막료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요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친등병, 친등병은 한 명도 없이 막료들과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