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남진 구강건강 팬사인회

‘틀니의 날’을 맞아 가수 남진과 구강건강관리의 중요성을 알리는 선두로 가수 남진의 팬사인회 및 구강건강강좌 진행

가수 남진이 ‘틀니의 날’을 맞아 구강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남진의 팬사인회는 7월 1일 틀니의 날을 맞아 주체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액티브 시니어’의 기본 조건인 구강건강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기획됐다.구강건강의 중요성을 알리는 가수 남진 광주학동을 찾은 남진은 트레이드마크인 환한 미소로 팬들을 맞이해 ‘건치형님’의 매력을 발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사인회에 참석한 팬들도 현장에서 남진의 히트곡을 부르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사인회를 찾은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노년기 구강건강 강좌를 진행했다.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위생관리법, 정기적인 구강검진의 중요성 등 치주질환을 예방하고 튼튼한 잇몸을 지키는 구강관리법을 교육했다.또한 이날 사인회에서는 남진의 사인과 함께 한정판 구강위생용품을 선착순으로 증정해 꾸준히 구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임윤태 원장은 “건강한 노년을 위해서는 평소 꾸준한 구강위생관리와 정기검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다”며 “좋은 취지에 참여하고자 바쁜 시간을 내주신 가수 남진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전했다.이날 사인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남진은 “구강 건강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환자분들에게 미소를 줄 수 있어 저에게도 오히려 힘이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1946.9.27. 전라남도 목포신체 172cm 가족 슬하 1남 3녀 학력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학사 데뷔 1965년 1집 [서울플레이보이] 수상 2014년 제13회 대한민국전통가요대상 남성이수부문 대상 작품공연, 음반, 곡, 방송, 영화기타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포일보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늦둥이 겸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남진은 유복한 환경에서 어려서부터 연극, 음악에 심취했다.남진의 집은 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 집에 자가용이 있었을 정도로 목포에서 꽤 부유한 집이었다.학생 때부터 닐 세다카, 폴 앙카 등 팝송을 즐겨 불렀던 남진은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 마스터에게 가수 제안을 받게 된다.이때 (비록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남진은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서울로 올라온 상태였다.

앞서 레스토랑 밴드 마스터로부터 당시 최고 인기가수 남일혜의 곡을 만든 작곡가 한동훈을 소개받았다.그에게서 자신의 음악학원에 등록해 연습생 생활을 할 것을 제안받는다.영화배우의 길을 꿈꾸던 그였지만 당시 순수하게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예뻐 등록을 하고 연습생 겸 연애생활을 시작한다.불과 몇 달 뒤인 1965년 드디어 첫 앨범을 녹음하게 된다.데뷔곡은 한동훈이 작곡한 ‘소울 플레이보이’라는 스탠다드 팝을 연상케 하는 곡이었지만 철저히 망해 실망한 그는 낙향했다.

다시 작곡가 한동훈이 당시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 제안을 하고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첫 번째 앨범과 달리 방송도 꽤 타고 히트 직전까지 갔지만 당시 노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에 의해 금지곡 처분이 됐다.금지곡이 된 타이틀곡명은 ‘연애 0번지’.

2집도 실패하자 그는 다시 고향 목포로 낙향해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그렇게 지내던 중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앨범에 담긴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누르며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 것을 권했다.이 곡은 2집 녹음 중 작곡가 김영광이 남진에게 부르게 했지만 남진이 트로트 부르기 부끄럽다는 이유로 거절한 곡이었다.이에 김영광이 그래도 노래가 아까우니까 제가 부르고 옆다리로 앨범 마지막에 넣겠다고 했는데, 그가 사정이 생겨 녹음 시간에 못 오게 됐다.어쩔 수 없이 곡수는 채워야 했기 때문에 남진은 내키지 않지만 녹음해서 앨범 마지막에 넣었는데, 이 곡이 바로 대박나 남진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다.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일단 트로트 곡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듬해 1966년 전두수 작사 박충석이 작곡한 ‘가슴 아프게’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그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때부터 남진은 영화배우로도 맹활약을 펼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 자리에 올랐다.

이후 나온 라커빌리 스타일의 불멸의 히트곡인 ‘마음이 예쁘지 않으면’은 그를 단순히 트로트 가수로만 한정시키지 않고 가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받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잘생긴 얼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창법과 무대 액션에 당시 소녀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이후 ‘너야 변하지 마’, ‘너와 함께’ 같은 대표곡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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